노충현의 그림은 가까운 것을 그린다. 가까움이란 무엇인가. 가까움은 거리를 상정하는 동시에 물리적 현상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가까움은 매일이나 자주 같은 빈도 혹은 이동 거리가 협소한 공간이며 동시에 익숙한 대상이 일순간 의식을 통해 건져 올려졌을 때 생경함으로 포착된 관계의 거리감이라 말할 수 있다. 노충현은 이를 “아침에 문득 거울을 보니 흰 수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주의가 산만하여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일이 허다한” 것이라 한다. 거울 앞에 서면 매번 마주했을 수염이 낯설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보이나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는 과정은 현상학을 떠올리게 한다. 관념에 가려지거나 표면 자체로 그친 대상을 다시 보고 달리 보는 의식 속에서 이면을 드러내는 일.
후설 이후의 현상학은 대상의 본질을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현상’은 보편적 현상이 의미하는 객관적 대상을 넘어서 의식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물질 혹은 비물질과의 경험을 의미한다. 이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을 때 존재 하나 존재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한 대상의 다른 면모를 보기 위해 가까이 보는 일은 자세히 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세히 보기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거나 선명히 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기록을 위해 촬영된 사진의 경우 시간의 순차성을 벗어나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끝없이 되돌리며 기계적인 재생을 반복한다. 찍힌 유수지는 유수지를 벗어날 수 없고 유수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멸하는 장면에 불과하다. 노충현의 가까이 보기는 유수지를 움직이는 시선이다. 이것은 되돌림, 되살아남이 아니다. 재생된 유수지가 표면에 고정된 ‘사실’이라면 <유수지의 밤>은 렌즈로 관측될 수 없는 다른 현실을 구성하는 ‘사실적인’ 이미지다. ‘사실’에서 벗어나 마주한 이면의 유수지는 밤의 성질인 어두워지기를 흐릿한 색채의 정념으로 표현한다. 멍의 색이 빠지는 시차처럼 짙푸른 밤이 레몬에 가까운 노랑이 되어갈 때 밤은 밤에서 벗어나므로, 다른 밤이 되어가므로 “그림도 나이가” 든다. 카메라에 포착되었던 각 장면은 가까이 보기를 통해 현상을 넘어 ‘현상’이 되므로 표면 이후의 이면을 지닌 입체적인 다른 현실이다. 이 세계에선 사실적인 눈발이 흩날리고 내부를 지니고 탄생한 세계의 지금을 품고 얼어간다.
시는 회화와 친연성을 보이며 현재에 이르러서도 빈번히 호출되는 장르이다. 그 빈번함에 비하여 회화의 언어를 사유하기 위해 동원된 시의 폭은 한정되어 보인다. 현대 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주요하게 작용한 개념 중 하나는 ‘환유’의 재정의이다. 환유는 전통적으로 비유 체계 속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같은 말이 전통적 환유의 예시이다. 그에 반해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서 착안한 오규원 시인의 ‘환유’는 ‘은유’와 길항되는 개념으로 ‘은유’가 유사성을 바탕으로 대상과 대치되는 것이라면 ‘환유’는 인접성을 통해 대상과 결합하는 것임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환유는 어떤 관념이나 대상의 설명을 위해 차용되는 개념이 아닌 각 대상이 이루고 있는 한 국면의 구조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김민조의 그림은 다르게 보기다. 다르게 보는 과정에서 개입되는 여러 요소는 일상의 풍경에 배치된 환상 혹은 상징으로 보일 수 있으나, 각 요소가 어우러져 한 국면을 조직하는 구조성은 환유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화면에 그려진 대상이 현실을 배척하는 의미로의 환상이나 특정 관념을 대치하기 위하여 쓰인 상징에 속한다면 <10마일 러닝로드>의 모형 말과 <물음 우물 울음>의 안테나는 그 자체로는 기능할 수 없으며 대치된 관념의 해명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때 모형 말과 안테나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김민조의 회화가 환유적인 것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대상이 고유한 성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인접한 심상의 사물과 접속한다는 점에 있다. 이를 통해 회전목마를 연상시키는 모형 말은 공중에 설치된 고가도로가 도로와 도로를 교접하는 동시에 지상과 허공을 교차하는 운동성으로, 나아가 빠르게 달리지만 도로를 벗어나지 않고 끝없이 회전하는 교통의 이면을 지닌 교묘한 위치에 놓인다. 화면에 펼쳐진 공장식 아파트와 멀리 보이는 서울의 풍경 또한 이러한 이미지의 체계 속에서 앞선 의미를 유추할 수 있게 작용하며 환유적인 장면 구성이 회화의 언어로 펼쳐진 가능성을 시사한다.
김민조의 다르게 보기는 화면을 이질적으로 만들기 위해 차용되는 다름이 아니다. 쉽게 발견할 수 없지만 상세히 관찰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을 드러내어 환유적 형상으로 표현하기 위한 다르게 보기이다. 창조적이라 할 수 있는 세계와의 접촉은 대상에 맺힌 민감한 요소를 찾아내어 이미지로 결정화하는 적극성을 가지고 있다.
나뭇가지에 얹힌 서리를 눈꽃이라 한다. 눈꽃은 꺾을 수 있는 꽃이 아니다. 그렇기에 눈꽃은 물러나서 지켜봐야 하는 꽃이다. 두 작가의 작품은 언어로 닿고자 하면 의미를 피해 녹아버리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그림은 물러서서 바라볼 때 언어로 귀결되지 않은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지닌다. 그럼에도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차이가 있지만 두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거친 터치는 도리어 정서를 적확하게 표현한다. 터치를 따라 세계를 둘러보고 나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존재함을 알아차린다. 녹아버릴 듯 아슬한 것이 작품이었는지 그것을 보고 난 뒤의 세계인지 아리송해진다. 나뭇가지에 얹힌 서리를 눈꽃이라 한다. 캔버스에 서린 것은 무어라 부르나.
글 - 이자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