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새방은 두 번째 프로젝트로 5월 11일부터 6월 4일까지 런던에서 활동하는 작가 서안나의 개인전 "낯선 이로부터의 위안"을 전시합니다.
화요일 - 토요일 (12 - 6pm), 서울 종로구 팔판길 1-14
서안나의 미묘한 순간들
이윤희 (미술비평가/ 큐레이터)
서안나의 작품들은 바라보는 이의 발걸음을 붙드는 힘이 있다. 관객으로서의 나는 아직도 그의 그림 앞에 서 있다.
최근 어떤 작품들 앞에서는 ‘그래그래, 아아 알겠어~’ 하고 휙 지나가거나 조급하게 겅중겅중 건너뛰기도 했는데, 그런 식으로 서안나의 작품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그 손바닥만 한 화면 위에 물컹하게 숨겨진 이야기들 때문이다. 서안나의 그림들에 모종의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보는 순간 직감하게 된다. 그저 눈에 휴식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색채와 형태의 조합이 아니라, 혹은 미술계의 인정 시스템에 대한 뻔한 노림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어떤 순간들이 그의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바로 느끼게 된다. 그림의 제목 이외에는 레퍼런스를 찾을 수 없는, 몇 번의 속도감 있는 붓질로 이루어진 그 작은 그림들에는, 대개 사람들이 포함된 어떤 광경이 담겨 있다. 서안나의 팔레트 위에 있는 특유의 보라와 주황과 노랑과 검정과 초록들이 몇 번의 붓질로 겹치고 겹쳐 만들어진 어떤 순간의 기록들은, 보는 사람을 멈칫하게 만든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이삼초에 스쳐 지나갈 법한 짧은 순간들이지만, 기억 속에 잠시 머무르게 되는 그런 장면들이 있다. 말로 표현하자면 그 미묘함이 사라질 수도 있는, 그리고 언어화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 장면들을 그는 오래 생각 속에서 굴리는 편인 것 같다. 그 장면들은 대개 ‘사건’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서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려운, 잠깐 낯설었거나 잠깐 눈길을 사로잡았거나 잠깐 마음을 움직인 어떤 장면들이 그의 화면에 담겨 있다. 어쩌면 한 사람이 살면서 기억 속에 남기는 모든 순간들은 이러한 잠깐들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이런 장면 말이다. 함께 전시하는 작가들이 전시장에 모였던 어느 날, 한 작가가 사람들의 무리를 그냥 스쳐지나가 자신의 작품 앞으로 다가간다. 한 공간에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있는 그 자신의 작품 앞으로 걸어가 서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때, 서안나는 그 장면을 기억에 담는다. 어떤 특별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어쩌면 그림의 주인공인 당사자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몇 초, 혹은 몇 분간의 이야기가 화면에 그려진다. 그 그림은 실제 담겨 있는 일화의 그 짧은 시간보다 더 오래 사람을 붙든다. 실제의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반복되는 일상이 비슷한 순간의 재조립으로만 이어지다가 사소한 차이만을 만들었을 그 장면은, 이제 서안나의 시선으로 영원한 것이 되었다.
그러한 시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의미의 카테고리 어디에도 제대로 수납될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의미들의 사이에서 떠돌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장면들을 포착하는 그러한 시선 말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이 덧없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은 이유는, 이미 알고 있는 일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놀랄 일도 없고 특별히 예상치 못할 기쁨이나 슬픔, 분노, 격정이 없을 때, 오늘이 어제와 같고, 올해가 작년과 같은 것이다. 인생의 초반기에 겪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긴장은 겪어내는 모든 일들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 표정은 무슨 뜻이었을까, 거리에서 보았던 그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부질없음을 알게 되는 때는 머지않아 찾아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은 돌아가고, 주어진 에너지와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나에게 쓸데있는 일과 쓸데없는 일은 전광석화처럼 분류되어, 어느 때부터는 불러도 못들은 척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늙은 개 신세가 되고 만다. 만사가 다 어디서 본 듯하고 별다른 감흥을 가지지 않는 사람의 시선은 대개 오만하다. 아는 것들, 경험해 본 것들 투성이라 이건 저렇고 저건 이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는 미묘한 차이를 무시한다. 하지만 서안나는 분명 이것과 저것 사이, 의미와 의미 사이에 있는 어떤 지점에 호기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어떤 순간을 끊임없이 기억에 담고, 끊임없이 읽고, 그중 어떤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다.
작품을 그의 인생으로부터 추출해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작가가 이십년의 세월을 타국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그리고 그것을 작품에 담아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언어와 사상의 뿌리가 다른 영국에서 그는 당연하게 국외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 가끔 돌아올 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인데, 이곳은 빠르게 변화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국 기반의 한국 작가’ 서안나, Anna Jung Seo는 국외자의 시선으로 어느 장면 하나 쉽게 놓치지 않는다. 그는 글줄 하나를 번역했을 때 발생하는 미묘한 차이에도 오래 고민한다.
그의 작품에 담긴 것은 그 미묘함들이다. 그의 작품은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을 담고 있지만, 그 낯섦은 세상을 처음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경기(驚起)와 같은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따스한 통찰을 담은 것이다. 신간의 목록을 훑는 것만도 바쁜 세상에 그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키 작은 프레데만 씨> 같은 고전을 손에 들고 있다. 그의 독서 목록은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유연한 태도를 탄탄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착하거나 비열하거나 저속하거나, 승승장구하거나 고통 속에 있거나, 그것은 모두 삶의 한 장면들이라는 수용적 태도 말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 장면들은 모두 ‘과정’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결론을 향해 가지 않는, 쉽게 결론을 내지 않는, 기다려주는 시선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하는 과정으로서 형태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들숨>과 <날숨>은 런던의 버스 안에서 앞자리에 앉아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고 쉬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익명적인 형태의 둥근 머리는 어린 아이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노인 같기도 하다. 인종과 성별과 나이가 어찌 되었든, 그저 모르는 한 사람이 버스의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눈을 감았을 것만 같다. 대중교통에서 지쳐 늘어져 있는 인간 군상들의 그림은 아주 쉬운 소재여서 이 작가 저 작가의 그림에서 ‘대상화’되어 있는 모습을 많이도 보아 왔지만, 서안나의 작품 속에 있는 그 인물은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알 수 없는 밀착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 작품을 두 번 반복해서 그리며 한 작품에는 <들숨>, 다른 작품에는 <날숨>이라는 제목을 부여했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그림 속 인물은 살아있다. 세계의 모방이 예술인 것인지, 예술의 모방이 세계인 것인지, 나는 그 작품들을 본 이후 버스에 탄 사람들의 모습을 서안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담담하지만 공감적인 시선은 낯선 대상에 가 닿으면서 쉽게 ‘이해’하려 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바라보는 자들의 공간을 크게 남겨놓는다.
그가 실제로 경험했던, 혹은 읽었던 책으로부터 강렬하게 느꼈던 어떤 이미지를 빠르게 담아내는 것은 캔버스보다 더 손에 잡기 쉬운 스케치북에 담겨 있다. 물감의 두께 때문에 뚱뚱해진 그 스케치북은 한 손에 잡아 후루룩 넘길 수가 없을 만큼 서로 다른 그림들로 이어져 있는데, 어느 때는 한 페이지에 한 장면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펼쳐진 페이지의 양쪽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한 장 한 장은 따로 떼어내 전시를 해도 좋을 만큼 흥미로운 것들이었지만, 한 권의 유일한 그림-책으로 존재해도 좋을 것이었다. 애초에 이 스케치북은 전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전시를 염두에 두었다면 종이의 양면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타협이 없다. 애초에 ‘관객을 상정한’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 자신의 순전한 몰입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앞으로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큐레이터의 몫이 될 것이다.
이번 공작새방에서의 전시를 미리 보기 위해 다시 그의 그림 앞에 섰을 때, 예상대로 그의 작품은 들쭉날쭉한 작은 캔버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은 크기는 작품에 가까이, 더 가까이 보는 이를 끌어들이기 때문에, 그가 담아내는 이야기들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보였다. 그의 그림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거대 서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은 그림들이 열어주는 문 속으로 들어가면, 누가 이 순간들을 함부로 결론으로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싶다. 단정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고, 복합적이고 개별적으로 분산되는 미묘한 순간들이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것, 그것이 서안나 작가의 작품이 주는 새로운 경험이다.
작가 약력
1964년생
2015–2017 터브스 아트 스쿨, 터브스 스튜디오 페인팅 프로그램, 런던, 영국
2011 시티 앤 길드 어브 런던 아트 스쿨 학사, 회화 전공, 런던, 영국
1999 연세대학교 박사, 불문학 전공, 서울, 한국
1989 연세대학교 석사, 불문학 전공, 서울, 한국
1987 연세대학교 학사, 불문학 전공, 서울, 한국
개인전
2022 낯선 이로부터의 위안 The Comfort of Strangers, 공작새방, 서울, 한국
2019 엉거주춤 Awkward, 킵 인 터치 서울, 서울, 한국
2017 Unfinished Street Magic, 스톤 스페이스, 런던, 영국
2014 Her 81 paces, 에이 앤 디 갤러리, 런던, 영국
2013 Memories Through Line and Colour, 바이너 스트리트 갤러리, 런던, 영국
주요 단체전
2022
London Art Fair 2022 (유니언 갤러리), 비지니스 디자인 센터, 런던, 영국
A Play of Features (curated by Aly Helyer and William Gustafsson), 유니언 갤러리, 런던, 영국
작은 드로잉전, 공작새방, 서울, 한국
Still Standing (curated by William Gustafsson), 유니언 갤러리, 런던, 영국
2021
Needles In The Hay (curated by Sasha Bogojev), 큐레이터스 룸,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Dialogues No.01(curated by Joshua Armitage), 리슨트 드로잉센터 (C4RD),런던, 영국
2020
Feeling for Murmuration, 에이. 피. 티 갤러리 (A.P.T Gallery), 런던, 영국
Royal Academy Summer Exhibition 2020, 로열 아카데미 (RA), 런던, 영국
Abstract with Figure (curated by Katrin Lewinsky and Aaron Ehrlich), 제임스 푸엔테스, 뉴욕, 미국
To Paint the gloom itself (curated by Karl Bielik), 테라스 갤러리, 런던, 영국
2019
Six Days in December(curated by Martin Gayford), 테임즈-사이드 스튜디오 갤러리, 런던, 영국
Royal Academy Summer Exhibition 2019, 로열 아카데미 (RA), 런던, 영국
Wolves by the Road (curated by Kate Mothes), 어셈블리 하우스, 리즈, 영국
The Other Side of the Moon, 바지하우스, 런던, 영국
CAPITULO I, 에이엠에이씨(AMAC), 리스본, 포르투갈
2018
Materias Primas, 파다 스튜디오 갤러리, 리스본, 포르투갈
Unreal Estate Project, 홈파인더스 에스테이트 에이전트, 런던, 영국
...the value of nothing, 스튜디오 1.1 갤러리, 런던, 영국
Conveyor, 모간 파인 아트, 뉴욕, 미국
Butterfly Effect, 바지하우스, 런던, 영국
A Caroming, 리슨트 드로잉 센터 (C4RD), 런던, 영국
Night follows night, 갤러리 98, 램스게이트, 영국
FBA Futures 2018, 몰 갤러리, 런던, 영국
2017
Turps Studio Programme 2017, 아트 버몬지 프로젝트 스페이스, 런던, 영국
Royal Academy Summer Exhibition 2017, 로열 아카데미 (RA), 런던, 영국
2016
It’s Offal (curated by Emma Cousin), 아트 하우스 1, 런던, 영국
The Discerning Eye 2016 (curated by Dan Coombs), 몰 갤러리, 런던, 영국
Looking Up, 스튜이오 1.1 갤러리, 런던, 영국
Turps Studio Programme, 터브스 갤러리, 런던, 영국
The Smaller, The Larger, 소버힝 갤러리, 파리, 프랑스
Bells From The Deep: Exhibition of the audience’s favourite artists, 헌드레드 이어스 갤러리, 런던, 영국
2015
Sluice Art Fair, 옥소 타워, 런던, 영국
Florence Trust Summer Exhibition, 플로란스 트러스트, 런던, 영국
Evidence, 알 케이 버트 갤러리, 런던, 영국
2014
Freed from DESIRE, 갤러리 223, 런던, 영국
2013
Collaborative Drawing Project with Dancers (Paintformance + The Body Canvas), 더 플레이스, 런던 컨템포러리 댄스 스쿨 (LCDS), 런던, 영국
2012
Drawing from Within, 아트 파빌리온, 런던, 영국
Lynn Painter-Stainers Prize 2012, 몰 갤러리, 런던, 영국
2011
Ruth Borchard Self-Portrait Competition & Exhibition, 킹스 플레이스 갤러리, 런던, 영국
Award / Prize
2011 The Brian Till Art History Prize For Humanities Thesis
2010 Philip Connard Travel Award (The Worshipful Company of Skinners) Runner-up
Residency
2018 PADA Studios & Residency, 리스본, 포르투갈
2014-2015 The Florence Trust Residency, 런던, 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