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세상 (2026)>
이희현
2026.11.11 - 12.5
시적(詩的) 순간은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다. 그대로인 현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과 시선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사소한 풍경이나 말 한마디가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살아 있음의 감각이 선연해지는 이 순간을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화가 이희현은 ‘오래된 세상’에서 평범한 일상이 시가 되는 시적 순간을 이야기한다.
대학 시절 그는 한적하고 소박하던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무심한 구경과 객쩍은 상념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이가 한참 들어, 세월과 추억의 켜가 겹겹의 미로처럼 쌓인 그곳을 배회하던 작가는 쏟아지는 분수 소리와 함께 머릿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대공원의 이미지들이 단숨에 되살아나 현재와 중첩되는 순간을 경험했다. 어떤 진공 상태에 빠진 것처럼, 아무 다른 소리도 허락하지 않는 이명에 갇힌 것처럼, 경미한 착란에 휩싸인 것처럼, 작가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미묘하게 어긋나며 분리되는 감각을 느꼈다. 또 다른 세상의 틈이 열린 순간이었다. 이전엔 알아채지 못했던 세계의 본질과 나의 마음이 고요하게 맞닿는 시적 찰나에 그는 자신만의 ‘오래된 세상’을 발견했다. 그러한 세상은 물리적 정체성을 넘어 감각의 층위로 전이되고 정서의 공명을 불러일으켜, 시를 읽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오래된 세상〉은 스쳐 갈 법한 공원 어딘가의 모습이지만 작가 안에서 내재화된, 대상이 속한 현실과 그 대상이 불러온 시간이 경계를 허물고 공존하는 정경이다. 그는 새롭게 만난 세상을 명료한 형태와 상황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실상이 명확히 파악되지 않도록 변용함으로써 불확실성이 자아내는 생경하고 모호한 분위기로 대상과의 거리감을 확보한다. 언어로 또렷이 단정 지으면 흐릿하지만 진실된 그 무엇이, 색이 배어들고 선이 녹아드는 가운데 존재하는 그 무엇이 사그라질까, 조심스레 단어를 골라 에두르듯 말이다. 기억과 사유와 현실이 서로 간섭하고 뒤섞이는 장면은 〈방〉에서도 엿보인다. 애태우며 세 아이를 보듬던 양육의 시간이 저문 지금, 북적이던 소란함과 부대끼던 분주함이 쇠한 빈자리에 작가는 손수 만들어 쓰던 찬장과 테이블, 그리고 연출된 그림들을 담았다. 방의 구석구석 먼지처럼 내려앉았을 가족의 허다한 사연을 대변하듯, 액자 속 누군가는 볼을 부풀려 악기를 불고, 들판에서 자전거를 달리고,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염소와 교감한다. 그렇게 소리와 에너지와 사랑으로 방을 채운다.
〈물총새〉는 그 철모르던 아이들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유년의 시절은 회한이나 그리움이란 손쉬운 말로 만만하게 돌아볼 수 없다. 복잡다단하게 얽혀 갈피를 잡기 어려운 오만 감정들이 번지듯 차오르기에 몇 마디 말로 풀어내려는 의욕은 속절없이 차단당할 뿐이다. 안온하지만 적막하고 무료했던 그의 유년은 팔 할이 하늘이었다. 툇마루에 누워 바라보던 시야는 온통 그지없는 광활함에 지배되었고, 사정없이 환한 한낮의 빛은 주위의 모든 색을 희부옇게 희석하고 말갛게 증발시켰다. 밝음에 집요하게 붙들린 그의 기억은 명암도 무게도 형태도 지우는, 반투명 베일을 두른 듯 옅고 희미한 화면의 원천이 되었다. 소년은 아담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기엔 어느새 훌쩍 자라버렸지만, 자기만의 둥지에 마냥 머물고 싶은 모양이다. 닳고 해진 애착담요의 모서리를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소년은 힘겨운 성장통을 달래고 위로받는 법을 스스로 깨쳤다.
소녀를 베개 삼아 느긋하게 드러누운 액자 속 염소의 얼굴을 우리는 〈염소君〉에서 제대로 마주치게 된다. 고유의 서식지에서 유리되어 우리에 갇힌 동물들은 어쩔 수 없이 서글픔과 외로움, 상실과 체념을 품기 마련이지만, 염소君은 도리어 잔잔한 연민의 눈길과 평온한 위안의 미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울타리 안이나 밖이나 결국 다를 바 없음을, 너나 나나 피차 고단하고 딱한 처지임을 이심전심으로 이미 느끼고 있어서일 것이다.
‘너 또한 나일 수 있다’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성찰은 이희현이 닮고 싶어 하는 시인의 태도와 이어진다. 그가 바라는 시인은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다, 타인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자기 일에 성실하게 책임지는 이들이며, 상대의 자리에 넌지시 서서 살피고 배려하는 이들이다. 작가는 긴 시간 붙들어 온 주제인 〈나팔수〉에서 시인이자 예술가인 자신의 모습을 기대한다. 조금은 남루한 차림에 왜소한 어깨와 부드러운 몸 선으로 성별이 탈각된 나팔수는 특정 시대와 장소, 과시와 신분을 걷어낸,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서지 않으나 보잘것없고 미약한 주변의 목소리들을 나팔로 전달하는 매개자이며, 화가 자신의 윤리적 자화상이다.
열두 해 전, 이희현은 같은 이름의 전시를 열었다. 2026년에 ‘오래된 세상’을 다시 불러오기까지 작가는 그 세상을 함부로 장악하지 않고, 그 세상이 가진 시간의 무게를 존중하며 오랫동안 지켜봐 왔을 것이다. 이제 그는 날카롭고 신선했던 자각의 모멘트, 그 시적 순간을 되살리려 한다. 오래된 세상을 만나는 일은 그에게 완결된 과거가 아니라, 점차 깊어지고 끊임없이 갱신되는 현재진행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글 - 송연승
















